어느 날 갑자기 홍콩행 비행기표를 끊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여행지로 꿈도 꿔보지 않은 홍콩행을 주저 없이 선택한 것은 그 전날 밤에 보았던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 때문이었죠. 덥고 습한 분위기, 북적북적하면서 깨끗하지 않은 그 거리에는 오묘한 분위기가 있어요. 오래된 것 같으면서도 가장 새롭고 가장 돈이 많으면서 가장 열악한 그곳, 그 독특한 홍콩의 감성. 잊고 살던 그곳에 자꾸만 가고 싶게 만드는 영상들. 아, 홍콩의 감성은 왕가위 감독의 작품에서 시작되었나 봅니다.
감독: 왕가위
장르: 로맨스, 드라마
러닝타임: 1시간 41분
감상 가능한 곳: NF
경찰 223은 사랑하는 연인에게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를 받고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녀를 기다리며 본인의 생일까지가 유통기한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매일 사는 경찰 223. 그러나 생일이 지나버린 다음 날, 그가 찾던 파인애플 통조림은 유통기한 지나 더이상 판매하지 않습니다. 한편 경찰 663이 들린 어느 샐러드 가게. 이 곳의 아르바이트생 페이는 경찰 663을 남몰래 좋아하고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경찰 663의 애인이 헤어짐을 통보하고는 이별 편지와 집 열쇠를 가게에 맡기고 가버립니다. 경찰 663은 그 편지를 받기를 거절하고, 열쇠를 손에 얻은 페이는 경찰 663의 집에 몰래 들어가 청소를 시작하는데.
처음 감상했을 때 정말 이상한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편의 옴니버스로 구성된 이 영화에서 첫 번째 경찰 223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던 차에 다음 경찰 663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도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고, 경찰 663을 좋아하는 페이가 가택무단침입자가 되어 집안을 몰래 청소하던 장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죠. 그러나 이 영화의 이상한 여운은 영화가 끝난 뒤부터 더욱 강해집니다. 자꾸만 떠오르는 장면들, 그제야 아, 이게 그런 의미였구나 생각하게 되는 순간들이 생기고, 어느 날부터는 캘리포니아 드림을 흥얼흥얼 거리게 되죠. 영화를 처음 볼 때에는 웬 홍콩에서 캘리포니아 드림을 불러재낄까 이상했는데, 이 음악은 이 영화 자체가 되어버렸어요. 홍콩행 비행기를 끊고 중경삼림 맨션에 가본건 모두 이 영화의 그 오묘한 분위기 때문이었어요.
감독: 왕가위
장르: 범죄, 드라마, 로맨스
러닝타임: 1시간 37분
감상 가능한 곳: 왓챠, 티빙, 넷플릭스, 웨이브
바람둥이 주인공 아비. 그는 매표소에서 일하는 소려진을 이렇게 꼬십니다. "너와 나는 1분을 같이 했어. 난 이 소중한 1분을 잊지 않을 거야. 지울 수도 없어. 이미 과거가 되어 버렸으니까." 그 1분에 갇힌 소려진은 결국 아비와 사랑에 빠지지만 아비에게 버림받죠. 아비는 그 뒤 루루 라는 여자를 만납니다. 루루는 아비가 본인을 떠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별 수를 다쓰지만, 아비는 자유로운 바람둥이입니다. 그가 이렇게 된 이유는 어릴 적 가정환경의 영향이 컸죠. 그러다 친어머니가 필리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비, 필리핀으로 향하는데.
발 없는 새에 대한 대사와 잊히지 않는 1분에 대한 장국영의 대사는 잊히지 않을 명대사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장국영이 맘보춤을 추는 명장면이 등장한다는 점, 이 장면이 많은 영화에서 패러디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2010년대에 보는 저로서는 아비라는 인물이 인간쓰레기로 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어릴 적 어떤 환경에서 자랐든 그게 다른 사람과 무슨 상관인가요. 상처 받은 소려진과 루루의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이 영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작으로 남은 이유는 뭘까 생각해봅니다. 그와 같은 상처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아서 일까요, 상처 입은 영혼을 보듬어주고 싶은 사람이 많아서일까요.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늘어진 러닝과 흰 팬티를 입은 장국영이 추는 맘보가 끝내주게 힙하다는 것.
감독: 왕가위
장르: 로맨스, 드라마
러닝타임: 1시간 39분
감상 가능한 곳: 2020년 12월 24일 - 현재 재개봉 상영중
리첸 부부와 차우 부부는 같은 날, 같은 아파트의 바로 옆집으로 각각 이사를 오게 됩니다. 옆집에 살다 보니 자주 동선이 겹치던 상황. 리첸의 남편도, 차우의 아내도 일 때문에 자주 집을 비웠고 이 때문에 리첸과 차우는 홀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집니다. 식사를 하러 가는 길, 집을 오가는 길, 자꾸만 자주 마주치는 두 사람. 그리고 이상한 것을 발견합니다. 리첸이 들고 다니는 핸드백이 차우의 아내가 들고 다니는 핸드백과 같았고, 차우가 매고 다니는 넥타이가 리첸의 남편이 매고 다니는 것과 같다는 것. 그들은 알게 됩니다. 서로의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이와 동시에 리첸과 차우의 마음도 서로를 향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선을 지키려 애를 쓰는 둘, 치명적인 분위기가 둘 사이를 흐르는데.
화양연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의미하는 이 말이 이 영화의 제목인 이유. 안타깝게도 두 사람이 기억하는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이 서로를 향해 금지된 사랑의 감정을 가졌던 그 순간인가 보군요. 이 영화는 위 두 편의 영화보다도 더 애틋합니다. 음악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렇고, 함께할 수 없는 둘, 그 선을 지키려는 둘의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보고 있는 이들의 마음까지 흔드니까요. 서로의 마음을 다잡으려 애쓰는 동안, 절절하고 애틋한 감정선이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그 분위기가 영화의 배경인 홍콩을 집어삼킬 듯합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명확해집니다. 홍콩의 분위기는 왕가위 감독이 만들었다는 사실을요.
감상할 때보다 감상한 후의 울림이 더욱 큰 영화, 늪처럼 헤어 나올 수 없는 분위기로 관객을 압도하는 작품! 왕가위 감독의 작품들은 볼 때마다 탄성이 터져 나옵니다. 오늘의 홍콩은 또 큰 변화가 있어 이 영화가 나오던 90년대와 다르겠지만 당시 가보지도 못했던 홍콩의 그 감성에 향수가 생기게 만들죠. 막상 방문한 홍콩의 분위기는 그보다는 너무 사람이 북적이고, 몸 하나 누일 곳이 부족해 한없이 좁고 비싸기만 한 곳이자, 빈부격차의 끝판왕을 볼 수 있는 숨 막히는 곳이었습니다. 이런 도시를 자꾸만 생각나게 하는 이유, 아련하게 기억하게 하는 이유, 왕가위 감독의 마법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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