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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과 은유의 영화 < 안티크라이스트 (Antichrist, 2009) > 해석

진득한 영화리뷰

by 호누s 2020. 11. 30.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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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과 은유의 영화 < 안티크라이스트 (Antichrist, 2009) > 해석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불편하고 불친절하지만 그 어느 작품보다 강렬한,

'안티크라이스트 (Antichrist, 2009)'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손에 꼽는 명작이길래, 언젠가 한 번은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이 영화, 어제 잠들기 전 문득 생각나서 보게 됐습니다. 

역시 칸 영화제 수상작 답게 뭔가 어둡고 연기력이 엄청나지만 지루하구나... 하고 보던 중, 충격과 공포에 잠에서 깨고 말았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봤던 그 어떤 영화보다도 충격적이고 무서운영화, 그리고 너무도 어려운 영화. 

너무 충격적이라 보자마자 손이 덜덜 떨릴 정도였어요. 잠들기 전 영화로는 아주 잘못된 선택...

 

도대체 이해가 안되는 채로 잠들었는데, 하루가 다 가도록 머릿속에서 이 영화 생각만 납니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해보고자 오늘은 해석을 위해 줄거리를 자세히 복기한 후 긴 글을 써보려 합니다. 


영화 정보

정식 포스터

개인평점: ★★

감독: 라스 폰 트리에

장르: 드라마, 공포

러닝타임: 1시간 48분

감상 가능한 곳: 왓챠

*청소년 관람불가*


줄거리 

*청불영화입니다. 장면에 대한 묘사가 불편할 수 있습니다. 읽기 전 주의해주세요.*

남자와 여자, 비유와 상징

하얗게 눈이 내리는 밤, 쏟아지는 샤워 물줄기 아래에서 부부가 격정적인 관계를 가집니다. 그 사이, 잠에서 깬 아이가 밖으로 나오고, 열려있는 창문으로 기어 올라갔다가 밖으로 추락합니다. 그렇게 부부는 아이를 잃었습니다. 아이의 장례식날, 쓰러져버린 여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병원에 입원한 후, 차도 없이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납니다. 치료사인 남자는 여자에게 당신의 슬픔은 특별한 것이 아니며, 퇴원 후 본인이 직접 치료해주겠다고 합니다. 집에 돌아온 여자는 남겨진 아이의 물건들을 보고 가슴이 아파 매 순간을 힘들어하지만, 남자는 이 슬픔의 과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자는 고통에 몸부림치다 매 번 남자에게 섹스를 요구합니다. 관계로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으로는 진짜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다며, 행동치료를 시작하는 남자. 여자에게 무서워하는 곳이 어디냐고 묻죠. 여자는 작년에 아들을 데리고 논문을 쓰기 위해 떠났던 숲, 에덴이 무섭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아니라고 하죠.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두려움을 마주해야 한다 말하는 남자, 여자를 데리고 에덴으로 향합니다. 인적 없는 울창한 숲 속, 나무다리, 풀숲, 그 가운데 자리한 거대한 죽은 나무. 오두막에서 남자는 다시 치료를 시작합니다. 땅을 한 발자국씩 밟게 하고, 무서워하는 곳을 걷게 하면서요. 여자는 치료를 받다가도 강력하게 거부하기도 하는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입니다. 자연이 사탄이라 말하는 그녀,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연일까요? 사탄일까요?

 

어느 날, 잠에서 일어나더니 다 괜찮아졌다고 기분 좋은 표정을 짓는 여자. 남자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남자는 문득 작년에 이 곳에서 여자가 논문을 위해 연구하던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다락방에 올라간 남자, '여성 살인'이라는 제목으로 스크랩된 중세 마녀사냥의 기록, 사진. 다락방 곳곳에 붙어있는 마녀의 처형 그림들. 남자는 여자를 깨워 이번엔 치료를 위해 역할극을 해보자고 합니다. 남자의 역할은 여자가 두려워하는 그 모든 것이고, 여자의 역할은 그것을 제외한 본인입니다. 여자는 본인이 연구하고 있던 주제와 정 반대의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면, 여자의 본성도 악하며, 그래서 여성 살인을 이해하게 됐다고 말이죠. 어이없어하는 남자. 밤, 섹스 중, 여자는 남자에게 본인을 때려달라고 말합니다. 이를 거부하는 남자를 밀쳐내고 숲 속으로 내달린 여자, 나무 아래에서 나체로 자위를 하는데. 남자가 다가가 다시 관계를 합니다. 그들과 한데 얽힌 나무뿌리 사이사이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새하얀 손들이 보입니다. 한 편, 여자는 남자가 숨겨두었던 아이의 부검기록을 보게 됩니다. 여자는 큰 반응은 없었지만, 남자는 아이의 발이 기형이었다는 사실은 아내에게 굳이 말하지 않았죠. 대신 작년에 이 곳에서 찍었던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며, 사진 속에서 아이에게 신발을 반대로 신겨놓은 것을 알고 있었냐고 묻지만 여자는 몰랐다고 합니다. 자세히 보니 모든 사진 속 아이는 신발을 반대로 신고 있습니다.

 

결말 *스포 주의*

굴 속에 숨은 남자를 기어코 찾아낸 여자

남자는 여자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을 'ME' 그녀 자신이라고 적습니다. 그 순간, 남자에게 나를 버릴 거냐고 소리치며 공격하는 여자. 갑자기 관계를 하려고 뛰어들더니 남자의 성기를 나무토막으로 내려찍고, 남자는 기절해버립니다. 그 사이 남자의 다리에 구멍을 뚫어 맷돌을 달아버리는 여자. 정신을 차린 남자는 여자가 없는 사이, 고통을 느끼며 나무 밑 여우굴로 피신합니다. 여자는 미친 듯이 남자를 찾아 헤매고, 결국 땅을 파서 남자를 꺼내죠. 그렇게 다시 집. 남자는 여자에게 본인을 죽일 거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세 명의 거지가 오면 한 사람이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여자. 여자는 남자를 부둥켜안고 울다가 문득 아이가 죽던 날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여자는 사실 아이가 창문으로 올라가 떨어지는 순간을 봤지만, 쾌락에 빠져 막지 않았죠. 여자는 가위를 들어 본인의 욕망의 근원, 클리스토리스를 거세해버립니다. 남자는 다리에 달린 맷돌을 제거합니다. 그리고 여자의 목을 졸라 살해한 후, 화형 시켜버리는데요. 집을 떠나 숲 속으로 걷다 산딸기를 따먹던 남자, 에덴으로 걸어 올라오는 수십수백 명의 얼굴 없는 여자들의 모습을 보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리뷰 & 해석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뮤즈

이 영화를 하루 종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슬픔에 대한 영화인 줄 알고 시작했는데, 이에 대한 영화는 결코 아닙니다. 영화의 제목 그대로 반 기독교적인 메시지가 담겨있다는 해설을 여럿 찾을 수 있었습니다만, 저는 성경은 잘 모르기 때문에, 성경에서 벗어나 해석을 해보려고 합니다. 

 

1. 

  이 영화에는 아이 외에 별다른 인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름도 없는 '여자'와 '남자' 둘 뿐이죠. 영화의 초반, 남자와 여자는 한데 얽혀있습니다. 그들은 표정도 같고,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도 같이 맞고, 침대에도 같이 눕고, 격렬하게 움직이지만 붙어있는 그 둘은 상이하지 않습니다. 마치 한 사람처럼 말이죠. 그리고 사건이 일어난 후, 여자는 아이를 잃은 슬픔에 깊이 빠져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호소하는데 비해, 남자는 좀 덤덤합니다. 그는 그녀의 슬픔이 특별하지 않은 것이며, '행동치료'로 치료할 수 있다고 설득합니다.

  여기서, 어느 장례식장의 한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슬픔으로 가득한 마음, 곡소리와 눈물로 가득한 방. 그럼에도 찾아와 준 사람들을 위해 상주는 정신을 차리고 사람들을 맞이하고, 덤덤한 태도로 안부를 묻습니다. 감정은 나락에서 요동치지만 이성은 예의를 차리기 위해 정신줄을 놓으면 안 된다 합니다. 영화 속에서 여자는 남자의 치료를 수용했다가 거부하기도 하고, 너는 의사가 아니라며 오만하다 남자를 비난을 하기도 합니다. 마치 장례식장에 찾아온 손님과 환하게 웃다가도, 지금 이런 상황에 태연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니 하고 현타가 온 상주의 모습처럼요.

  이 영화에서 결국 남자는 이성이며 여자는 본능을 상징합니다. 이 둘은 애초에 하나이며, 하나의 인간 안에서 벌어지는 이성과 본능의 싸움입니다.

  본능은 고통에 몸부림치다 그와 상반되는 것, 쾌락을 추구합니다. 갑작스럽게 슬퍼하다가 성관계를 원하는 본능. 본능을 잠재워야 하는 이성은 이런 상황에 무슨 섹스냐며 처음엔 거부를 하는 모습을 보이죠. 그러다 본능은 역할놀이를 통해 본인을 명확하게 자각하게 됩니다. 이 역할극에서 반대로 남자는 본능의 역할을, 여자는 이성의 역할을 해야 했는데, 그저 느끼기만 했던 본능을 '이성'의 언어로, 명확하게 규명하면서 (인간의 본능은 악하며, 그러므로 여성도 악하다), 오히려 본능을 더욱 각성을 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 이후로부터 본능은 미친 듯이 탈주하기 시작합니다. 본인의 자유를 추구하고, 그 자유를 억압하는 이성을 공격하고, 욕망의 행위를 제어하지 못하고, 도덕을 상실한 채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면서 말입니다. 숲 속에서 본능을 제어하지 못한 여자와 관계를 하는 남자. 이 부분만큼은 결국 본능에게 끌려가버린 이성을 나타내는 듯합니다. 무기력하게 본능에 당해버린 이성. 그러나 끝끝내 미쳐 날뛰는 본능을 죽여버립니다. 그렇게 끝인가 싶었는데, 수많은 여성들이 에덴으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성이 인간의 본능을 아무리 죽이고 억압하더라도, 내면의 본능은 다시 살아나 꿈틀거릴 것이고, 그렇게 자라난 수 많은 욕망이 다시 우글우글 대는 개인의 마음속, 그리고 그 본능에 충실한 욕망들이 모여 이루어진 오늘의 사회. 이 모습을 본 이성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표정을 짓습니다. 

 

2. 

  본능은 동물적인 것이자, 가장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새끼는 태어나자마자 젖을 먹을 줄 알고, 동물은 먹이를 사냥하며, 자연스럽게 명을 다한 생물들은 떨어져 죽습니다. 우리는 숲을 말할 때 '생명으로 가득한'이라는 수식어를 넣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여자, 본능의 눈으로 바라본 숲은 '죽음의 공간'입니다. 인간만이 규정하는 '이성'이라는 것이 없는 공간, 숲. 즉, 자연에서는 나무가 말라 죽고, 철 지난 도토리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동물이 서로 먹고 먹히며, 놀란 사슴은 사산한 새끼를 달고 다닙니다. 삶의 시작과 끝이 당연하고, 피가 낭자하는 생태계가 있는 곳. 본능 그 자체가 자연입니다. 인간사회는 '이성'을 추구하면서, 이성에 반하는 행동을 '악'이라고 규정해버렸습니다. 예를 들어 자연스럽게 느끼는 비탄, 고통, 절망을 현대 사회에 살기 위해 '치료해야 하는 것, 없애야 하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죠. 육체적 쾌락, 죽음 등 우리가 지금 어둡고 비밀스러운 것, 감춰야 하는 것, 수치스러워하는 것, 무서운 것으로 생각하는 가치들은 '이성'에 의해 그렇게 규정되었을 뿐입니다. 그저 자연에 , 그리고 우리 본능에 내재되어 있는 당연한 것임에도 말이죠. 

  여자는 작년에 이미 에덴에 방문해 이 사실을 깨달아버렸습니다. '본능'은 사회에서 규정하는 대로 악하며, 악한 이들은 결국 이 모든 가치를 '악'으로 규정하는 '이성'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을요. 이성은 본능의 머리채를 잡고 '바른길로 인도한다'는 명목 하에 억압을 시행합니다. 중세시대의 마녀사냥이 그렇습니다. 마녀사냥이 공공연해진 배경에는 1400년대의 '마녀의 망치'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이 책에서 여자는 유혹과 정욕에 약하며, 머리가 나쁘다며 여성을 잠재적인 마녀로 규정하는데, 이로 인해 수많은 여성들이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중 특히 교회를 다니지 않는 여자, 남편이 없는 여자, 돈이 많지만 가족은 없는 여자, 동성애자 등 당시 남성 중심의 사회가 규범에 어긋나는 여성을 '마녀'로 몰아붙여 결과와 무관하게 죽여버렸습니다. 이에 대해 연구하던 주인공 여자는 그렇게 본인의 주체인 본능에 대해 인지하게 되어 버렸고, 그로 인해 이성에게 죽임을 당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이 에덴 숲을 두려워했습니다. 영화의 에덴을 지옥으로 해석하는 글을 많이 봤지만, 저는 에덴이 인간의 내면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서 본능은 본능 그 자체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성이 규정하는 대로라면 '더럽고' '추악한' 그 모습을 말이죠. 따라서 여자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그 자신, 본능이었습니다. 본능이 온몸을 집어삼킨 쾌락의 순간, 아이가 창문으로 올라가는 것을 봤음에도 '이성적인 행동' 대신 '본인의 쾌락'을 선택해버렸으니까요. 

 

3. 

영화의 한 시간 가량은 치료사가 마음의 병을 깊게 앓는 여성을 치료하는 내용처럼 전개됩니다. 자신이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동안 아이가 죽었으니, 얼마나 죄책감이 심하겠어요. 이 치료의 과정이 꽤 현실적이었는데, 실제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2년간 우울증에 시달리며 받았던 치료를 반영한 것이라 하더군요. 우울증. 사전적으로는 "의욕 저하와 우울감을 주요 증상으로 하여 다양한 인지 및 정신 신체적 증상을 일으켜 일상 기능의 저하를 가져오는 질환"이라고 합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본인의 감정을 컨트롤할 수가 없습니다. 제멋대로 구는 감정은 저 지하 끝까지 곤두박질치고, 불안이 엄습합니다. "이제 그만 일어나서 뭐라도 해야지! 기분이 좋아지려면 단 걸 먹어야겠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으니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 일반적으로 우울할 때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고, 행동에 옮깁니다. 그럼 우울하던 기분이 다시 좋아지고, 정신 차리고 일상을 이어나갈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우울증이 심한 경우, 그 기분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에너지도 나지 않고, 의욕이 없고, 뭔가를 하려면 답답하고 눈물만 납니다. 그 상황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늘 죄책감에 시달리고, 나를 미워하고,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이르게 됩니다. 감독은 본인의 우울증을 스스로 케어할 목적으로 안티크라이스트의 시나리오를 썼다고 합니다. 축축 무거워지는 우울, 자기혐오. 반대로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된다며 기운내고 일반으로 돌아오라는 이성과 사회의 목소리, 병원의 치료법. 이 영화는 2년간 본인의 심연으로 가라앉은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스스로와 싸워냈던 자전적 기록일지도 모릅니다. 


저의 개인적인 해석은 여기까지입니다. 

아직 풀리지 않은 점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도 결국은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가 신발을 거꾸로 신기면서 학대를 자행했고, 아이가 죽는 것을 방치했다고 해석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아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적 해석과 페미니즘적 해석이 필요한 부분일지도 모르군요.

 

수많은 상징들로 가득한 이 영화, 볼 때보다 보고 나서가 더욱 흥미롭고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정말 충격적이지만, 그 정도로 강렬한 영화. 손에 꼽으라면 제가 보았던 영화 중에 가장 충격적인 영화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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